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컬럼비아 레코드 (문단 편집) ===# 1889년 ~ 1929년: 컬럼비아 레코드 #=== 컬럼비아 레코드 회사는 1889년 1월 15일, 속기사, 변호사, 뉴저지 출신 에드워드 D. 이스턴(1856–1915)과 투자자 그룹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것은 본사가 있던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이름을 따왔다. 처음에 그것은 워싱턴 D.C., 메릴랜드, 델라웨어에서 에디슨 축음기와 축음기 실린더의 판매와 서비스를 지역적으로 독점했다. 일부 지역 축음기 회사들의 관습처럼 콜롬비아는 많은 상업적인 실린더 음반들을 자체적으로 제작했고, 1891년에 그것의 음악 음반 목록은 10페이지였다. 1894년 북미 레코드 회사와 에디슨의 관계는 북미 축음기 회사의 해체와 함께 단절되었다. 그 후 자체 제조한 음반과 축음기만 판매하였다. 1902년 컬럼비아는 오래된 재고를 소진하기 위해 성형된 갈색 왁스 레코드인 "XP" 레코드를 도입하였다. 컬럼비아는 1903년에 검은색 왁스 레코드를 도입하였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1904년까지 갈색 왁스를 계속 성형하였는데 가장 높은 숫자는 32601 "하이니"로 아서 콜린스와 바이런 G. 할란이 듀엣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성형된 갈색 왁스는 (아마도 컬럼비아 제품에 대한 시어스의 옥스포드 상표로) 유통을 위해 시어스에 판매되었을 것이다. 컬럼비아는 1901년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의 에밀 베를리너(Emile Berliner)가 발명하고 특허 받은 디스크 레코드와 축음기를 실린더 시스템 외에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이보다 앞서 1899년에는 작은 크기의 세로로 잘린 레코드를 사용한 토이 그래폰(Toy Graphophone)을 판매했다. 10년 동안 컬럼비아는 에디슨 레코드 회사 실린더와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 디스크 레코드 모두와 미국 녹음 사운드 톱 3 중 하나로 경쟁했다. 초기 예술가 목록에 명성을 더하기 위해 콜롬비아는 1903년부터 녹음을 하기 위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많은 스타들과 계약을 맺었다. 이 스타들 중에는 마르셀라 셈브리히, 릴리안 노르디카, 안토니오 스코티, 에두아르 드 레스케 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들의 녹음 기술적 기준은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빅터, 에디슨, 영국의 "그의 주인의 목소리" 또는 이탈리아의 "포노티피아 레코드"가 거둔 성과만큼 높지 않다고 여겨졌다. 1904년 각각의 디스크의 양쪽에 녹음 홈이 찍혀있는 디스크를 만들기 위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1908년 컬럼비아는 그들이 "Double-Faced" 디스크라고 부르는 것을 성공적으로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이 10인치짜리는 처음에 개당 65센트에 팔렸다. 이 회사는 또한 경쟁사인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가 판매한 매우 인기 있는 "빅트롤라"와 경쟁하기 위해 내부 경적인 "그라포놀라"를 선보였다. 이 시기에 컬럼비아는 매지컬 노트(Magic Notes)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16분의 1(semiquaver)은 원을 그리며 미국과 해외에서 사용되었다. 컬럼비아는 뉴욕주 올버니의 인디스트루서블 레코드 회사가 만든 셀룰로이드 실린더 레코드를 "컬럼비아 인디스트루서블 레코드"로 발행하기로 결정한 후 1908년 왁스 실린더 레코드의 녹음 및 제조를 중단했다. 1912년 7월, 컬럼비아는 디스크 레코드에만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1~2년 더 인디스트루서블 실린더를 컬럼비아 이름으로 계속 판매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린더 축음기의 제조를 중단했다. 컬럼비아는 두 개의 회사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레코드사, 하나는 플레이어사였다. 컬럼비아 축음기는 코네티컷으로 옮겨졌고, 에드 이스턴은 그것과 함께 갔다. 결국 그것은 딕타폰 회사로 이름이 바뀌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